중국 고대 황제 (二)

편집자:홍유운    2013-12-27 14:44     출처:중국청년망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1]으로 있다가 진(秦)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가 항우(項羽)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정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2]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천하통일

화친으로써 항우는 동부로 물러나고 유방도 서부로 물러나려 했지만, 장량과 진평은 퇴각하는 항우의 군대를 공격하자고 진언했다〔여기서 양군이 물러나면 초군은 기세를 회복하겠고 한은 이에 맞서지 못하리라고 간주한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항우군의 후방을 덮치면서 한신과 팽월에게도 병사를 거느리고 항우 공격에 참가하라고 요청했는데 유방에게 은상을 약속받지 못한 이 사람들은 누구도 오려 하지 않았고 이 점을 장량에게 지적받은 유방은 과감히 한신과 팽월에게 큰 영지를 은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한다. 한신과 팽월의 군이 가세한 유방군은 단번에 세력이 커져 항우을 상대로 유리한 처지에 섰고 사태의 추이를 파악한 다른 제후들도 유방에게 재가담하면서 항우를 해하까지 결국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항우와 초 병사들의 저항은 거세었고 한군은 연일 크게 희생했으므로, 장량과 한신은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포위한 상태에서 보급을 차단하는 공격으로써 초군을 붕괴시켰다. 항우는 남은 소수 군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초로 도망치는 상황을 차마 감내하지 못하고 도중에 한의 대군과 싸우다 자해했다〔해하의 싸움〕. 결국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에게 추대받으면서 황제로서 결국 즉위했다.

논공행상에서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듣지 않고 소하를 제일로 했다〔실패만 거듭했던 유방은 소하가 늘 준비한 병력과 물자가 없었으면, 옛적에 멸망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으며,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시 태연히 한중 진영에 가담하는 등 유방의 눈에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던 옹치를 맨 먼저 십방후(什方侯)로 삼았다. 이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누르고 반란하지 않게 하려는 장량의 계책으로, 다른 제후들에게는 '(유방이 그토록 미워하는) 옹치에게도 상이 주어졌으니 나에게도 제대로 된 은상이 내려지리라'라고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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