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베일 벗기기] 서태후의 도자기: ‘대아재’ 자기 감상

출처: 人民网    2018-04-19 14:22:00   편집자: 

   
[역사의 베일 벗기기] 서태후의 도자기: ‘대아재’ 자기 감상

 

  [인민망 한국어판 4월 18일] ‘대아재(大雅齋)’ 자기는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 디자인하고 만든 어용(御用) 자기다. ‘대아재’ 자기는 오랫동안 궁궐 깊숙한 곳에 소장되어 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은 그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농염하고 화려한 ‘대아재’ 자기는 청(淸)나라 말기 궁전의 풍습을 대표했고, 자희 개인의 심미 추구와 선호도를 나타냈다. 저물어가는 청나라 말기 도자기 제조업에 있어서 자희태후의 특별한 사치는 독특한 정취를 더했다. ‘대아재’ 자기는 청나라 말기 가장 유명한 어요(御窯) 자기로 불리고 있다.

  ♦ 자희에 관하여

  ‘대아재’ 자기를 언급하면 먼저 자희를 이해해야 한다.

  

 

  색을 입힌 후 확대한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의 사진 [베이징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 소장]

  자희는 엽혁나랍씨(葉赫那拉氏), 만족(滿族)으로 청 도광(道光) 15년(1835년)에 태어났다. 자희의 조부인 경서(景瑞), 부친인 혜정(惠征)은 모두 5품(品) 관원이었다. 청 함풍제(咸豐帝) 혁저(奕詝)가 등극한 후 함풍 원년(1851년) 2월 1차 팔기 수녀 선발에서 당시 16살의 엽혁나랍씨가 선발되었다. 함풍 6년(1865년) 3월에 재순(載淳)을 낳은 후 의귀비(懿貴妃)로 책봉되었다. 함풍제가 죽은 후 재순이 즉위하면서 의귀비는 황태후로 봉해졌다. 동치(同治) 원년(1861년) 4월 자희황태후로 휘호가 봉해졌다. 광서제(光緒帝)가 죽은 후 자희는 부의를 사황제(嗣皇帝)로 세우고, 자신은 태황태후로 봉하기로 했지만 다음 날 의란전(儀鸞殿)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 청 왕조 200여 년의 역사에서 자희는 함풍, 동치, 광서 세 왕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통치했다. 자희는 중국 근대사에서 한때 권세를 떨치며 심오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역사 인물이다.

  자희는 최고 통치권력을 가졌었지만 동시에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일생 중 권력을 독차지하고 독재정치를 한 것을 제외하고 여성으로서의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고, 경극(京劇)과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으며,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좋아했고 정교한 도자기도 좋아했다.

  ♦ ‘대아재’의 유래

  

 

  ‘대아재(大雅齋)’ 분채하당노사문항(粉彩荷塘鷺鷥紋缸)

  ‘대아재’는 자희가 직접 지은 것으로 그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곳의 건물 이름이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대아재’는 원명원(圓明園) 내 ‘구주청안(九州淸晏)’ 중의 ‘천지일가춘(天地一家春)’에 위치해 있었다. ‘대아재’ 자기는 이곳의 건축물을 위해 특별히 구운 자희 전용 자기다. 불행히도 제1차 아편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질렀을 때 ‘대아재’는 ‘천지일가춘’과 함께 전소돼 사라지고 말았다.

  ♦ 예술 풍격

  

 

  ‘대아재(大雅齋)’ 란지분채화조도반(藍地粉彩花鳥圖盤•1쌍)

  ‘대아재’ 자기는 청나라 말기에 구워 만들어졌다. 격동하는 사회 환경에서 자희는 자기의 혁신에 정력을 투자할 많은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다. 여러 가지 요인의 제한으로 ‘대아재’ 자기는 전 왕조의 양식과 예술풍격을 답습해 궁정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구현했다. 단지 양식에서 수려하고 정교한 것에 더 치우쳐 여성의 독특한 심미적 특징을 지녔다. 이런 특징의 형성은 자희태후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어요 자기 자체는 군주의 심미관을 사물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다른 관요(官窯)나 민요(民窯) 기물들과 비교할 때 ‘대아재’는 광서 시대 어용 가마 자기의 최고 수준을 그대로 나타냈다. ‘대아재’ 자기의 예술 풍격은 유색이 신선하고, 문양이 정교하며, 자기의 형태가 다양하고, 낙관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귀납할 수 있다.

  ♦ 유색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선지수도도대함(松石綠地粉彩仙芝壽桃圖大缸•1쌍)

  ‘대아재’ 자기의 유색은 강렬한 정서화와 윤곽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색채의 대비 변화를 활용해 대자연 속 고유 물상의 미적 감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대아재’ 자기는 같은 기물에 자주 네다섯 가지 색깔의 배합이 등장한다. 하지만 색과 색의 조화로운 배합은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때로 상큼하고 우아한 문인의 기품이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숙연하고 진중한 귀족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아재’ 자기의 예술적인 운치다.

  ♦ 도안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등나화조도타원반(松石綠地粉彩藤蘿花鳥圖橢圓盤)

  ‘대아재’ 자기의 도안은 전통 관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의 꽃, 새, 동물을 그려 넣어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신선한 경지가 느껴진다. 묘사해 낸 화려한 꽃들과 새가 울고 나비가 춤추는 자기의 화조 세계는 자연에 대한 자희태후의 아름다운 동경을 표현했다.

  ♦ 형태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등나화조도사두(松石綠地粉彩藤蘿花鳥圖渣斗)

  ‘대아재’ 자기는 형태적인 면에서 큰 그릇들을 많이 선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수려하고 정교한 그릇들로 자희태후의 여성 전용 상징을 드러냈다. 요약하면 주로 다음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1. 종류가 풍부하고, 대부분이 일상 생활용 자기다.

  2.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화분의 형태가 다양하다.

  ♦ 낙관

  

 

  ‘대아재(大雅齋)’ 황지묵채화조도완(黃地墨彩花鳥圖碗)

  ‘대아재’ 자기 입구의 연결되는 곳에 ‘대아재’ 세 글자로 가로로 찍혀 있고, 오른쪽에는 붉은색 도장으로 ‘천지일가춘’이 쓰여져 있다.

  ‘대아재’ 자기 대부분 그릇 바닥에는 붉은색으로 쓴 ‘영경장춘(永慶長春)’ 네 글자의 해서체 낙관이 찍혀 있다. 하지만 ‘영경장춘’ 낙관을 쓴 모든 자기에 ‘대아재’나 ‘천지일가춘’의 낙관이 찍힌 것은 아니다. ‘영경장춘’ 네 글자는 길언(吉言) 낙관으로 자희태우가 자신의 영원히 청춘을 간직하길 바라는 아름다운 소망을 담고 있다.

  

 

  ‘대아재(大雅齋)’ 녹지묵채화조문봉합(綠地墨彩花鳥紋捧盒)

  ‘대아재’ 자기는 당명관[堂名款•만들어진 자기에 자신의 당명(堂名), 재명(齋名) 혹은 연호를 새기거나 쓰는 것]이다. 이는 청대 여성 가운데 자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동치 13년(1874년) 후 국가의 권력이 그녀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아재’는 당호(堂號)인 동시에 자희 개인의 심미안과 취미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정의 일을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 그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대아재’는 그녀의 이러한 ‘예술’ 추구에 꼭 들어맞았다. (번역: 이인숙)

  원문 출처: 인민망(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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